Martha Root 마사 루터


성업 선양자 마사 루트

모험적인 여성, 마사 루터

한 젊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험을 꿈꾸었고, 창의적인 지혜를 가졌으며,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태어난 시대는 여성의 삶의 선택지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가정에 머물러야 했고, 고등교육을 받거나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치 않았습니다.

마사 루터(Martha Root) 또한 그러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사회적 통념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습니다. 1872년에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사고로 인해 자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삶의 필연적인 과정으로 여겨졌기에, 그녀의 선택은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바느질, 뜨개질, 요리 등 당시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즐기던 활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도 마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학 교육을 받겠다고 결심했고,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1889년 대학에 진학하여 언어와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마사 루트

 


직업과 봉사

졸업 후, 그녀는 신문사에서 일하며 저널리즘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언론계는 남성 중심의 세계였고, 여성 기자의 자리는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마사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다양한 언론사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과 그녀의 폭넓은 관심사는 이후 바하이 신앙을 전파하는 그녀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사는 강한 의지와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바하이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게 됩니다.


1915년 7월 18일, 일본 도쿄의 첫 번째 바하이인 후쿠타 씨(마사 오른쪽에 앉은)와 마사 루트와 아그네스 알렉산더.

 

바하이 신앙과의 만남

1908년, 그녀의 인생을 바꾼 만남이 있었습니다. 붐비는 식당에서 친구들과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근처에 앉아 있던 한 남성이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그 남성은 로이 빌헬름(Roy Wilhelm)으로, 마사에게 바하이 신앙에 관한 책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사는 그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로이는 그녀에게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다른 책을 건넸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마사는 결국 바하이 신앙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1909년 마침내 바하이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바하이로서 처음으로 한 일은 신문에 바하이 신앙에 대한 기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터키 아드리아노플 주지사와 시장, 마사 루트(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마리온 잭(앞줄 맨 오른쪽)과 함께.

 

사자의 포효처럼

1912년, ‘압둘 바하(‘Abdu’l-Bahá)’께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마사는 그분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뉴욕과 워싱턴에서 열린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마침내 ‘압둘 바하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바하올라의 아들이자 언약의 중심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만남에서 그녀는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압둘 바하는 미국을 떠나기 전, 바하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숭고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힘쓰십시오. 그러면 어쩌면 여러분의 노력으로 인해 세계 평화의 빛이 비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사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녀는 저널리즘에 쏟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바하이 신앙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기에 신앙심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더해졌습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바하올라의 메시지를 들을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1912년, 마사는 북미 방문 중 압둘 바하를 만났을 때, 장기적인 국제 선교여행을 제안했습니다. 압둘 바하께서는 이 계획을 승인하셨지만, 한 가지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그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녀의 평생에 걸친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사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바하이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농부부터 여왕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바하올라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하이 공동체는 마사 루터를 신앙의 위대한 교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합니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많은 도전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하올라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전 세계를 수차례 여행한 성업선양자(Hand of the Cause of God)였습니다. 압둘 바하는 그녀에게

“…세계를 여행하며 사자의 포효처럼 외치라.”

 

라고 말씀하셨고, 그녀는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이란 시라즈에 있는 바브의 집에서 마사 루트. 1930년 5월 4일.

 

위험을 무릅쓰고

1919년 겨울, 마사는 ‘압둘 바하의 《신성한 계획의 서한》에 대한 응답으로 남미 서해안에서 안데스를 넘어 파나마까지 여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극도로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녀를 말리며 혹독한 눈보라와 동상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마사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신앙의 힘을 믿고 여행을 감행했습니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위험천만한 여정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휴식을 취하기보다 지역 신문에 바하이 신앙에 대한 기사를 싣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단 한 순간도 허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스파한에서 이란 바하이교도들과 함께한 마사 루트. 1930년 4월 25일.

매 순간을 기회로

마사는 여행 중에도 항상 기회를 찾아 신앙을 전했습니다. 
남미 서해안을 항해하는 배에서 마사는 각 항구를 방문 할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바하이 자료와 신문 기사를 전달하는 기회를 찾았습니다. 페루 리마 근처에서 3시간 동안 기항하는 동안, 마사는 신문사 사장과, 상원 의원, 두 명의 의사에게 소개의 글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시간이 매우 부족했지만, 마사와 같은 영적인 모험가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마사는 리마에서 전차를 탔고, 기적처럼 두 명의 영어를 할 수 있는 젊은 페루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그녀를 유명 호텔의 지배인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 매니저는 그녀를 대신해 만나고 싶었던 네 명에게 소개글과 함께 바하이 소책자와 신문 기사를 전달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임무를 마친 마사는 배로 돌아갔습니다. 후에 파나마에서 하바나까지의 5일 간의 여행 중에 마사는 선장에게 바하이 신앙에 관한 발표를 할 수 있는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이 발표는 그 여행 구간에서 제공된 유일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녀의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어떤 날도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숭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마사 루터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바하이 신앙을 전파하는 데 바쳤습니다.

 

 

“누군가가 말씀을 전할 기회에 주저함을 느낀다면, 어떤 종에게도 같은 날이 두 번 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압둘바하께서는 ‘사자의 포효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고’ ‘새들의 노래처럼 왕국의 선율을 노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숭고한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세상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If anyone feels timid about asking for opportunities to speak, let him remember that no day comes twice to any servant in the Cause, and ‘Abdu’l-Bahá has said to ‘roar like a lion the Words of God’ and ‘sing like a bird the Melodies of the Kingdom’. The great heart will not falter — and the world is ready!”

 

 

신앙의 요람에서

1930년 1월, 마사 루트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이라크를 거쳐 이란으로 여행하며 약 4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바하올라께서 탄생하신 이 땅, 신앙의 요람을 직접 밟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 순례는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많은 위험과 도전을 동반한 여정이었습니다. 당시 이란 정부는 바하이 신앙을 좋게 보지 않았기에, 그녀의 행보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이란 국경을 넘자마자 마사는 종교적 편협함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세관원들은 그녀에게 바하이 서적을 소지하고 있다면 전부 불태워야 한다고 통보했습니다. 다행히도 마사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책을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쇼기에펜디는 마사가 이란에서 불필요한 주목을 받지 않도록 지방신성회(지성회)만이 그녀를 맞이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많은 군중이 몰릴 경우 정부 관리나 성직자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열정은 이를 뛰어넘었습니다. 마사가 가는 곳마다 수백 명이 그녀를 환영하러 몰려들었으며, 심지어 타종교인들까지도 그녀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가즈빈에서는 바하이들이 동원한 45대의 자동차가 그녀를 호위하며 환영했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테헤란에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바하이 신자가 운영하는 호텔에 머물렀으며, 방문객들은 먼저 호텔 주인과 만난 후에야 그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는 자신의 사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강연을 지속하며 여러 신문에 기사를 기고하는 한편, 정부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타브리즈에서는 바압께서 순교하신 장소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경찰서장과 총사령관이 그녀를 정원 파티에 초대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장소는 바압께서 감옥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셨던 창문의 바로 아래였습니다. 마사는 그들에게 바하이 신앙에 대해 설명하며 관련 서적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란에서의 순례는 시라즈 방문으로 절정을 맞았습니다. 그녀는 바압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신 집을 직접 보았고, 그 순간 감격에 겨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메시지가 이렇게 작은 집에서 시작되었다니!”

시라즈에서는 정부 관리들이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며 도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공개 강연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물라(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은 그녀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모스크에서 그녀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바압의 집에서 환상을 보았고, 바하올라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나는 매일 강연을 했고, 시라즈에서는 수많은 무슬림 앞에서 연설했습니다. 어느 정원에서 열린 강연에는 1,100명이 넘는 남성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란에서 바하이 신자들이 여전히 박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는 가는 곳마다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부셰르에서는 한 군 장교가 그녀를 병원으로 초대했는데, 그곳의 의료진 대부분이 바하이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여정은 언제나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라들이 그녀를 체포하려고 도로를 감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부셰르로 가는 길을 자동차 대신 비행기로 이동했습니다. 또한, 이란을 떠날 때는 새벽 3시에 배를 타고 몰래 항구를 빠져나갔습니다. 이처럼 그녀의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신앙과 용기의 증명이었습니다.

이란을 떠나며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페르시아, 바하올라께서 축복하신 땅이여! 나는 이곳에서의 4개월 동안 평생을 살아낸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하올라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은혜와 자비로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내면의 드라마였고, 때로는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사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도전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발걸음

마사 루트가 겪은 도전들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장기간 암과 싸웠으며, 끊임없는 통증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누군가 그녀에게 휴식을 권할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쉬지 않습니다. 나는 행동 속에서 쉼을 얻습니다. 나의 가장 완벽한 휴식과 기쁨은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여행하던 시대의 교통수단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습니다. 배멀미로 고생하며 폭풍우 속에서 방에 갇혀 있어야 했고, 울퉁불퉁한 길을 마차나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자동차가 보급되었어도 도로 상태는 여전히 험난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한정된 자금으로 숙박비와 식비를 감당해야 했으며, 하루 종일 강연과 인터뷰, 기사 작성, 편지 답변 등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여성 혼자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 보호자 없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마사 루트는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바하이 신앙을 전하는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의지하며 여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병마가 그녀를 점점 약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연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신앙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쇼기에펜디가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한 이유일 것입니다. “마사 루트는 영웅이며 성인입니다.”

 

 

영감을 주는 존재

쇼기에펜디께서는 이란의 바하이들에게 보낸 한 서한에서 마사 루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남성과 여성 교사들의 지도자이며… 놀라운 능력과 비할 데 없는 용기, 그리고 변함없는 신념을 지닌 독보적인 신자…”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쇼기에펜디 께서는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습니다.

 

“후세는 그녀를 ‘압둘바하의 성명’이 불러일으킨 최초의, 그리고 가장 뛰어난 성업선양자로 확립할 것이다. 현재 세대의 동료 신자들은 그녀를 바하올라의 신앙이 형성기의 시대에 탄생시킨 첫 번째이자 가장 훌륭한 열매로 인정한다.”

 

또한,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을 가리켜 이렇게 숭고한 표현을 남겼습니다.

 

“위대한 천상 회중이 그녀를 맞이하며 외쳤다. ‘환영하노라, 오 교도자들의 영광이여! 참으로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오 왕국을 향한 매혹 속에서 네 모든 것을 희생한 자여…’”

 

쇼기에펜디께서는 마사 루트가 현재와 미래 세대의 바하이 교도자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그녀를 다음과 같이 기리셨습니다.

 

“…그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극히 소수의 바하이 교도자들만이 갖출 수 있었던 그러한 가르침의 자질을 완벽히 체현한 인물로, 오늘날과 미래의 바하이 교도자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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