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자 아블파즐 (Mírzá Abu'l-Faḍl)은 바하이 신앙의 저명한 학자로서 이집트, 투르크메니스타, 미국에 바하이 신앙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바하올라의 사도(Apostles of Baháʼu'lláh) 중 한사람이며 바하올라를 실제로 만지는 못했습니다. 압돌바하는 그를 아블파즐(미덕의 시조始祖)라고 불렀습니다. 아블파즐의 학문적 업적과 헌신적인 봉사는 바하이 공동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생애와 교육

 1844년 이란의 골파이간의 저명한 종교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압돌바하와 같은 해에 태어남) 아블파즐은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 신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을 통해 뛰어난 학자로 성장하였으며, 당대의 종교 학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873년 테헤란의 종교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대학의 학장으로 선출 되었습니다.

 

바하이 신앙과의 만남

미르자 아블파즐이 바하이들과 처음 만난 것은 1876년 초 테헤란에서였습니다. 당시 그는 깊은 종교적 논의에 관여하던 중, 학문적 배경이 없는 한 평범한 옷감 상인, 아까 압돌 카림(Aqa ʻAbdu'l-Karim)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둘은 종교적 난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는데, 시간이 흐르며 아블파즐은 압돌 카림의 예리한 통찰력과 도덕적 품성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바하이였으며, 논의 중 제시한 대부분의 관점이 바하이 경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아블파즐은 큰 충격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블파즐은 바하이 신앙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다른 바하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아블파즐과 한 바하이 대장장이(Ustad Husayn-i-Na'l-Band, 말굽 대장장이)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다음은 그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여행 중 한 당나귀의 편자가 빠지는 일이 발생하여 일행은 근처 대장간을 찾았습니다. 미르자 아블파즐의 긴 수염과 커다란 터번을 본 대장장이 우스타드 후세인은 그가 지닌 방대한 학문의 깊이를 직감하며, 이 배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는 미르자 아블파즐에게 다가가, 오래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 하나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허락을 받은 대장장이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아파 이슬람의 전통에서 비가 내릴 때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한 방울 한 방울을 동반한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아블파즐은 ‘그렇다’라고 답했습니다. 잠시 뒤, 대장장이는 또 다른 질문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아블파즐은 다시 허락했습니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대장장이는 말했습니다. ‘집에 개가 있으면 그 집에는 결코 천사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아블파즐은 이번에도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장장이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그렇다면, 개가 있는 집에는 비도 내리지 않아야겠군요.’
그 순간, 이슬람의 저명한 학자인 미르자 아블파즐은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대장장이에 의해 논리적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크게 당황하고 분노로 가득 찬 것을 알아차렸고, 속삭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대장장이는 바하이입니다!’"


이 사건 후 몇 달 동안, 아블파즐은 저명한 바하이 지도자인 나빌 아크바르(Nabíl-i-Akbar), 미르자 이스마일 다비흐(Mirza Ismaʻil Dhabih), 그리고 아까 미르자 하이다르 알리 아르디스타니(Aqa Mirza Haydar ʻAli Ardistani)를 포함한 여러 바하이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는 특히 미르자 이스마일 다비흐의 집에서, 바하올라의 두 서한인  라후-이-라이스(Lawh-i-Ra'ís)**와  라후-이-푸아드(Lawh-i-Fu'ád)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 서한들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돌 아지즈(Abd-ul-Aziz)와 재상 알리 파샤(ʻAli Páshá)의 몰락, 그리고 술탄이 아드리아노플(현재의 에디르네)을 잃을 것이라는 예언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블파즐은 만약 이 서한들에 언급된 예언들이 실제로 성취된다면, 자신은 바하올라를 믿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몇 달 후, 바하올라의 서한들에 예언된 사건들이 정확히 성취되자, 미르자 아블파즐은 1876년 9월 20일에 바하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바하이가 되었습니다. 바하이가 되자마자, 그는 새로운 종교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개종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종교대학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조로아스터교 어린이를 위한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우스타드 자반마르드(Ustad Javanmard)와 물라 바흐람 악타르-카바리(Mulla Bahram Akhtar-Khavari)를 포함한 몇몇 조로아스터교도가 바하이 신앙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테헤란에서 보낸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바하이 신앙을 교도했으며, 미르자 후세인 하마다니(Mírzá Husayn Hamadani)와 함께 바비교와 바하이 신앙의 역사를 기록한 타리크-이-자딛(Tarikh-i-Jadid, 새로운 역사)를 편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테헤란에서 그는 세 차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1. 첫 번째 투옥: 1876년 12월, 그가 바하이 신앙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처음으로 투옥되었으며, 5개월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2. 두 번째 투옥: 1882-83년에 약 19개월간 투옥되었습니다. 당시 테헤란의 총독이었던 캄란 미르자(Kamran Mirza)가 종교 지도자인 사이드 사디크 상글라지(Sayyid Sadiq Sanglaji)의 요청으로 약 50여 명의 바하이들과 함께 그를 체포했습니다.
3. 세 번째 투옥: 1885년 10월, 캄란 미르자의 명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1882년 이후의 여정과 활동
미르자 아블파즐은 1886년 바하올라로부터 바하이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여행하라는 서한을 받은 후,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서 광범위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저술은 이란의 유대인들에게 바하이 신앙을 효과적으로 소개하며 많은 사람들이 바하올라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여행 중에는 카샨, 이스파한, 야즈드, 타브리즈와 같은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1888년에서 그 후 3년 동안 그는 아슈하바트, 사마르칸트, 부하라를 여행했습니다. 아슈하바트에서는 저명한 바하이였던 하지 무함마드 리다 이스파하니(Haji Muhammad Rida Isfahani)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아블파즐은 살인 재판에서 바하이들을 대변하는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바하이 신앙이 이슬람과 독립된 종교임을 인정받도록 도왔습니다. 사마르칸트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최초의 아프간 바하이인 아타올라 칸 박사(Dr. ʻAta'u'llah Khan)가 바하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1894년: 악카 방문
아블파즐 은 1894년 악카에서 압돌바하와 10개월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후 이집트 카이로로 이동하여 몇 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카이로에서 그는 알아즈하르 대학교(Al-Azhar University)의 약 30명의 학생들을 바하이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알아즈하르는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집트의 작가들과 잡지 출판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기사를 이집트 언론에 기고했습니다.

 

1896년: 나시루딘 샤의 암살과 박해
1896년, 이란의 나시루딘 샤가 암살되자, 바하이들의 적이었던 자이무드다울레(Zaʻimu'd-Dawlih)는 바하이들이 암살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이용해 이집트에서 바하이들을 학살하려 했습니다. 아블파즐 은 바하이들을 변호하며 자신이 바하이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후, 그의 저서  파라이드(Fara'id)와 알두라룰바히이야(Al-Duraru'l-Bahiyyih)가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에 출판되자 알아즈하르 대학교는 아블파즐 을 배교자로 선언했습니다.

 

1900-1904년: 유럽과 미국 여행
1900년부터 1904년까지 아블파즐 은 압돌바하의 요청에 따라 파리와 미국을 여행했습니다. 그의 강연과 저술은 초기 바하이 공동체가 자신감을 갖고 바하이 신앙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파리에서는 그의 강연이 안톤 하다드(Anton Haddad)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약 30명이 바하이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901년 가을, 아블파즐 은 미국으로 이동해 시카고에서 가장 큰 바하이 공동체를 대상으로 많은 강연을 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워싱턴 D.C.로 이동해 바하이들과 일반 대중에게 강연을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바하이 신앙에 대한 소개서를 꾸준히 집필했습니다.

 

그린 에이커(1903년)
1903년 7월과 8월에는 메인 주의 그린 에이커 바하이 학교(Green Acre Baháʼí School)에 머물며 바하이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1904년: 중동으로 귀환
1904년, 압돌바하는 아블파즐에게 중동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했으며, 뉴욕시에서는 1904년 11월 29일, 바하이들이 그의 송별회를 성대히 열었습니다.

 

말년 (Later Years)
미르자 아블파즐은 생애 후반을 대부분 이집트 카이로에서 보냈으며, 1914년 1월 21일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베이루트와 하이파를 방문했으며, 1910년 8월 압돌바하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1911년 중반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압돌바하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1912년 말, 아블파즐 은 병에 걸렸고, 그의 친구 아카 무함마드 타기 이스파하니(Aqa Muhammad-Taqi Isfahani)는 그를 카이로 자신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머물다가 1914년 1월 21일 사망했습니다.

아블파즐 이 사망한 후, 압돌바하는 바하이 증거집(Baháʼí Proofs)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추도사를 남겼습니다. 바하이 연구의 역사학자인 무잔 모멘(Moojan Momen)은 아블파즐이 비판적 사고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바하이 신앙에 대한 깊은 헌신을 보여줬다고 평가합니다. 모멘은 또한 그의 저술에 대해 "그는 현대 사조에 대한 예리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동양 언어들만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는 놀라운 능력이었다"고 하며, 바하이 가르침을 다양한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적용했다고 말했습니다.

 

저술가로서의 미르자 아블파즐  
미르자 아블파즐은 바하이 신앙과 관련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바하올라의 사명을 입증하는 증거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작성했습니다. 그는 바하이 신앙의 중심 인물들과 쇼기에펜디로부터 지속적으로 칭찬받았습니다. 그의 논문과 서한은 기독교 및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바하이 신앙을 소개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의 개념과 접근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미완성 원고를 포함한 서류들은 그의 조카가 살고 있던 아슈하바트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들 중 다수는 러시아 혁명 동안 소실되었습니다.

압돌바하는 그의 저서 <빛나는 증거(The Brilliant Proof)>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미르자 아블파즐이 런던의 한 설교자의 비판에 답하는 논문을 썼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한 부씩 소장해야 합니다. 읽고, 암기하며,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신앙에 비우호적인 사람들이 제기하는 비난과 비판에 맞설 때 여러분은 잘 무장하게 될 것입니다."

 

미르자 아블파들은 그의 학문적 노력뿐만 아니라 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과 시련을 겪었지만, 이 모든 상황에서 바하이 신앙에 대한 헌신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바하이 신앙의 초기 역사와 확산에 있어 중요한 기여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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